제목 없음


제목: 뼁끼로 그린 민들레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3-04-02 17:24
조회수: 3382 / 추천수: 708


20130323streetlife_2_700.jpg (140.2 KB)





페인트를 뼁끼라고 부르던 시기(?지역)가 있었다. 페인트보다는 뼁끼라는 표현이 그 물성의 느낌에 가까워서 나는 뼁끼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실은 페인트를 비하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큰돈 안 들이고도 집수리나 마감재로 만만했던 뼁끼, 기능 면에서 만능이라 추켜세우며 여기저기 칠하다 보니, 세월은 흘러바래고 낡아 칠한 곳에 얹어 칠하고 그 위에 다시 덧칠해서 그전 뼁끼와 나중 뼁끼가 합세해 비늘 벗어지듯 너덜거려 큰 골칫거리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각 있는(?) 자들이 아직도 뼁끼칠이 손쉬운 대안이라고 딴은 획기적인 안이라고 제시하는 현실이 암담하기 그지없다.

10년 가까이 나는 시(市)를 위해 도시디자인 심의를 하면서 공원이나 건물, 도시 가로물(공공시설물), 신축 및 리모델링용 구조물에 이르기까지 뼁끼칠 좀 그만하자고, 나중에 어떡할려고 그러냐 식의 노래를 불렀었다, 그 노력 탓인지 도시 한 가운데는 신축 중인 건물 가림막과 몇 항목을 제외하곤 뼁끼칠이 줄긴 했지만 도심을 벗어나 중소도시를 흘깃만 스쳐도 그 몹쓸 뼁끼문화가 이미 한반도를 잠식해버렸음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의 오지라고 할 깊은 산골 마을에도 이놈의 뼁끼란 녀석이 고색창연한 돌담장에, 손때 묻은 나무 대문에 심지어는 곱게 낡은 기와에까지 올라앉아 헤픈 웃음을 짓고 있다. 더구나 문화마을이니 벽화마을이니 예술마을 체험마을에, 더 기가 막히는 일은  친환경 생태마을이라 이름 지어 놓고도 뼁끼로 덧칠을 하는 현실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잃는다.

정겨운 그 오랜 세월의 때를, 살가운 우리네 정서를 한꺼풀 덮어버린 뼁끼가 미워서라도, 사진을 위해서 그간 뼁끼칠 벽화는 카메라에 잘 담지 않았다. 물론 개중엔 효자 뼁끼칠도 있긴 하지만 그걸 즐겨 담으면 이 뺑끼문화를 조장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이대로 가다간 우리나라가 온통 뼁끼로 도배가 될 것 같아 내심 겁도 나는 게 사실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한가한 오후, 시간을 보내려 어슬렁거리던 한 주택가 골목에서 뼁끼가 해낸 기특한 작업 하나를 발견했다. 좁은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 앞에 만들어 놓은 작은 디딤돌, 현관으로 들어가는 축담 같이 생긴 디딤돌 귀퉁이에 민들레가 그려져 있다.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모퉁이, 사람의 눈길도 잘 닿지 않는 한 자 높이쯤 되는 디딤돌의 한 모퉁이에 올망졸망 민들레가 피어 있다. 누구일까, 그늘진 작은 모퉁이에 뼁끼로 민들레를 그려 넣은 자. 그가 그린 민들레는 어떤 의미일까. 희망일까? 이상향일까? 아니면 이 곳에 민들레가 피었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바람일까?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화가의 가슴을 빌어 추측해 본다. 더 높고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뛰어나고..., 최상급 형용사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을 향해 화가는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 싶다. 작고 어둡고 낮고 후미진 곳에도 생명이 살고 있어요. 빠르지는 못해도 게으럼 피지 않고 열심히 걷는 거북이가 있어요.

그렇다, 벌새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1분에 수십번을 넘게 날개짓을 해야 하듯, 호박이 한번 구르면 될 일을 도토리는 수십번을 굴러서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그런 삶도 있음을, 민들레처럼 몇 차례나 밟혀고도 물 한 방울 흙 한줌 없어도 꿋꿋이 하늘을 향하는 삶, 그런 삶을 제발 좀 느린 걸음으로 봐 달라고 화가는 민들레의 목청을 빌어 소리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넓은 담장을 화려하게 채워서 행인의 시선을 단박에 잡는 큰 그림보다 도화지 한 장 크기도 안되는 후미진 곳에 그려 넣은 민들레 몇 송이, 이 민들레 몇 송이는 그동안 필자가 접했던 그 많은 뼁끼칠을 대변이라도 하듯, 골리앗을 대적하는 다윗의 돌팔매처럼 필자의 가슴에 몹시 아픈 일타를 가해왔다. / 金必然







       
이호규   2013-04-03 03:13:09
지난 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에서는 '뺑끼'기 아닌 '뼁끼'로 불렀습니다. 어찌했던, 민들레 키높이에 맞춘 틈새공략(?)이 멋집니다. 페인터의 지략?
김필연   2013-04-03 10:22:12
아~ 뼹끼...
맞아요, 예전에 이진수의 뼁기통이란 장편이 있었지요.
페인트--> 뼁끼가 더 나을 것 가아요.
아휴~ 뺑짜 다 고치려면 날 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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