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빗방울 같은 지적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08-03-05 13:15
조회수: 6772 / 추천수: 1178


XN6R6623_journal.jpg (95.4 KB)




메마른 대지에 듣는 빗방울 같은 지적   /글과사진: 김필연


2001년 9월, 서울역사박물관 개관준비팀에 합류하면서 처음 만나게 된 강홍빈 교수, 지금은 서울시립대에서 가르치고 계시지만 당시엔 서울시 제1행정부시장이셨고 서울역사박물관 개관준비위원회 위원장이셨다. 강홍빈 교수님을 처음 뵌 그 시기는, 이듬해 5월에 치를 2002년 월드컵 개막에 맞추어 그동안 추진해 오던 대형작업들이 개관을 앞당기느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밤을 하얗게 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서울역사박물관의 그래픽디자인을 맡았는데 마감에 쫓기다 보니 나는 그래픽 분야뿐 아니라 종국에는 내 일 네 일 따질 짬도 없이 여기저기 다른 회사에 가서 자문과 디렉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개관준비위원회는 한 달에 두번 열렸는데 바로 전날, 디자인 수정에다 회의자료 출력에다 무척 바빴는데 어김없이 다른 회사에서 요청이 왔다. 박물관 사인디자인을 좀 봐 달라는 거였다. 박물관에 있는 모든 실명(室名)들을 수십 가지의 색을 사용하여 근소한 차이로 구분해야 하는 무척 섬세한 작업이었다. 밤늦게 그 회사 디자이너와 씨름을 하다가 다른 회사 직원이니 마냥 까다롭게 굴 수도 없고 최종원고를 넘길 때 다시 시간을 갖고 수정을 할 요량으로 미흡했지만 그 상태로 회의 자료를 만들어 회의장에 가져갔다.

각 분야마다 보고와 질의가 진행되던 중에 내가 준비한 자료를 찬찬히 훑어보시던 강 교수님께서 나를 향해 쓰윽 웃으시더니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하셨다. 이내 손가락으로 내가 찜찜해했던 바로 그 부분을 가리키시며 “이 건 휴(Hue 색상)가 조금 다르다...,” 하셨다. 익히 그분의 탁월한 감각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예리하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 감성을 지닌 분이셨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분 특유의 부드럽고 조용한 어투였지만 발이 저린 상태에서 지적을 받았던 나는 그 부드러움조차도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깊이 꽂히고 말았다.

그 일로 하여 내 사전에 더는 설렁설렁 눈가림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은, 비록 초안일지언정 의뢰인에게 내놓는 그 순간의 시안이 최종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게 된, 내 디자인 인생에 있어 제2의 시작점이 된 계기였다. 그때의 지적은 마치 물기 한 점 없이 바싹 메말랐던 내 가슴에 후두두 소리 내며 듣는 빗방울 바로 그것이었다.  


월간 행복한 동행 창간3주년 기념 특집/
커리어를 쌓아 오는 과정에서 만난 ‘행복한 동행’ 칼럼









       
온달   2008-03-05 13:45:53
김필연 작가님 !
글 내용을 보면서 대단 하시다는걸
새삼 다시 우러러 보입니다 하였든 영광입니다.
항상건강하시기를요^^*
김필연   2008-03-05 23:21:15
에구참,
별 걸 가지고 다 그러시네요.
저도 아무튼 영광입니다. 고맙구요,..^^
신정순   2008-03-06 07:31:44 [삭제]
유사한 경험을 했었던 저에게도 다시한번 마음을 다지는 글을 읽습니다.
흙을 만지는 도구를 손에서 놓지않고 마지막까지 다듬고 살피는 정성을 가지겠다는..

고마운 일입니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가슴이 그득해집니다.

우연이 만들어 주었던 필연님과의 만남..
저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김필연   2008-03-06 23:16:57
신정순님,
언젠가 그 얘기 슬쩍 비추셨지요. 그 얘기 좀 들려 주세요.
궁금해요. 워낙 인연을 소중히 하는 정순님 성정에
그런 일화를 그대로 흘려버리지 않으셨을 것 같아서요.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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