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근사한 침략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5-07-27 17:14
조회수: 1768 / 추천수: 260


_PY_5769_600_1.jpg (111.9 KB)



겨울, 막바지 추위에 이사를 했다. 옮긴 사무실 건물의 북쪽 창 곁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흘깃 봐서 죽은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남쪽으로부터 꽃소식이 올라온 이른 봄날 아침, 춘흥을 이기지 못하고 창을 열었는데 죽은 나무라 여겼던 그 나무 가지에 연초록 새움이 터서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저 여기 있어요, 숨 쉬고 있어요,’

아차, 산 나무였구나. 놀람도 잠시, 기온이 올라가면서 냉방기 작동으로 창은 자연스레 닫혔고 나무의 존재도 내 뇌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한여름 무더위가 몽니를 부리던 날, 하필 그때 냉방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창을 열었다.

이런이런, 창을 열자마자 수천수만의 초록 이파리들이 짙푸른 함성을 지르며 위용도 당당하게 내게로 달려들었다. 얼떨결에 초록부대의 침략을 받은 셈이다. 이런 침략, 참으로 근사한 침략이 아닐 수 없다.

너 거기 있었는데, 거기서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나는 내 앞만 보느라 너를 잊었었구나. 그래, 오늘은 네 초록빛 잎사귀에 취해 종일 비틀거려도 고맙고 미안한 마음 다 어쩌지 못하겠다.

고맙다 나무야.


*
사람 떠난 지 오랜 폐공장 터를 지키는 풀꽃들, 사람은 떠나도 또 봐주지 않아도 제 할 일을 하는 한결같은 자연의 묵묵함에 깊은 경의를 보내며. /金必然









       
김호종 / White Paper   2015-08-17 09:00:13
근사한 침략도 매우 좋지만
근사하게 받아 주시는 감성이 축복이며 부럽습니다.
김필연   2015-08-24 14:30:33
ㅎㅎ~ 해석이 멋지십니다.
언제나 후덕한 성정, 또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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