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못난 게 더 귀하다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9-11-18 20:25
조회수: 183 / 추천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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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게 더 귀하다
/必然

며칠 전 현관 앞에 무 5개가 든 자루가 놓여 있었다. 무를 놓고간 분은 우리 교회 협동목사님이신데 암 투병 중인 아내가 속한 암 환자 모임의 회원에게 좋은 채소를 공급하고자 농사 짓기 시작했다고. 농지는 목사님 댁 서울 강북에서 꽤 먼 안성이고 그래서 자주 물을 주지 못하는 데다 당연 유기농인 관계로 시장이나 마트에서 익히 보아온 무들과는 비주얼부터가 다르다.

매끈하고 말쑥하진 않지만 그 무가 어찌나 귀한지 깍두기도 담그고 소고기뭇국도 끓이고 무채나물과 무말랭이도 만들고, 분주히 움직였더니 앞으로 며칠은 찬 만들 수고 없이 여유부리며 끼니를 해결하게 되었다. 행여 무의 생김새 때문에 거저 주고도 미안해서 두 번 세 번 '예쁘지는 않아요, 일거리 드려서 죄송해요'를 되뇌던 목사님 사모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문득 몇 년 전 일이 떠오른다. 우리 아파트 앞 길옆에서 직접 심은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열무 솎은 것, 부추, 상추, 쑥갓 등 어떤 때는 완두콩이나 호박잎 머위잎도 팔곤 했는데 하루는 자잘한 케일을 가져왔기에 덥석 사들고 집에 와서 단을 풀어 보니 잎마다 구멍이 숭숭 뚫려 없어진 부분이 남은 부분보다 더 많은 잎도 더러 있었다.

잎에 뚫린 구멍들은 분명 벌레들 작품이리라. 케일 잎 위를 스멀스멀 기면서 잎을 잘라먹는 아티스트(?)들의 몸짓을 떠올리면 썩 달갑지는 않지만 나는 안다. 케일을 기른 아주머니의 마음을. 몇 해 동안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미 값을 치른 채소라 해도 봉지에 담을 때 잎사귀가 다칠까 조심스레 다루는 그 손놀림을 생각하면 구멍 뚫렸다고 어찌 불평을 할텐가.

그분의 영향으로 나는 채소를 다듬을 때 '식용 불가'와 '식용 가능'의 갈림길에서 다소 누레진 떡잎도 머뭇거림 없이 식용 가능 쪽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 비록 예쁘지 않아도 못났어도 자신이 키운 생명을 귀히 여기는 그분의 예쁜 마음자리가 떠올라 누런 잎도 쉽게 버릴 수 없게 되었고 먹을 때 내가 조금은 대견도 해서다.

못났다고 그 속성까지 못났으랴. 암 환자에게 치유에 도움을 주고자 한여름 뙤약볕도 불사하고 기른 못난 무와 벌레 먹어 구멍 뚫린 케일 잎, 상품으로는 가치가 다소 떨어질지라도 귀히 여기는 손길. 그 참된 교훈을 어느 책 어느 명사의 강연에서 얻을까. 못났다고 어찌 귀하지 않고 값이 높지 않다고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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