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정당한 도둑질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3-04-18 23:08
조회수: 3813 / 추천수: 802


daisy_1_1.jpg (164.8 KB)





오래전에 꾸리고는 미처 풀지 못했던 짐 속에서 그림 한 점을 찾아냈다. 초록 바탕에 하얀 꽃 데이지를 그린 수채화인데 버리기도 보관하기도 어중간한 습작 뭉텅이에 끼어 있었다. 묵은 물감 냄새와 함께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겪었던 일화가 떠올라 피식 실소가 터진다.

1988년, 한국이 올림픽이란 큰 잔치로 시끌벅적하던 그해, 나는 영국에서 디자인 공부 중이었는데 습작용 교재로 쓰던 수채화 책 한권을 손에 넣기 위해 고심 했던 이야기이다. 디자인 수업 시간에는 작업할 때 주로 사용한 재료가 구아슈(gouache)라는 불투명 물감으로 혼합이 쉽고 발색도 선명한 장점이 있긴 해도 농담(濃淡)이나 원근감에선 아쉬움이 많은 재료였다. 그 아쉬움을 채우고 영국수채화도 배울 겸 해서 강의를 신청하고 진도를 따라갔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학교 수업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 도서관에 가서 수채화 실기 책을 빌려 습작으로 보충을 했다. 특히 마스킹액(Masking Fluid)을 사용하는 작업에 재미를 붙여 책 내용대로 따라 하면서 모작도 했는데 문제는 책을 반납할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였다. 그 책을 다시 빌리려면 일정 기간이 지나야 하므로 책을 구하려고 서점으로 갔다. 우려했던 대로 출간한 지 오래된 책이어서 구할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빌리고 반납하고 또다시 빌리기를 반복하다 지쳐갈 즈음, 한 유학생 선배가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분실한 경우 책값을 물면 되니까 그 책이 꼭 필요하면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서관으로 갔다. 내 영어가 어설퍼서 말이 꼬이면 들통날까 봐 남편에게 비상통역사로 동행을 부탁했다. 남편은 내키지 않는 어투로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 책을 복사하면 안 되겠냐, 출국 전에 그 책에 있는 그림을 다 그려버리면 될 것을,..,’ 하지만 책을 소유하는 것 외 어떤 대안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서관 담당자에게 책을 분실했다고 하니. “아. 그러시면 책값을 내면 됩니다.”라는 즉답이 날아오리라 예상했는데 뜻밖에 “2주간 여유를 줄 테니 그때까지 찾으면 가지고 오세요.” 한다. 이 얼마나 친절하고 사려 깊은 배려인가. 다른 때 같으면 감동할 일 아닌가. 하지만 그 정도 반응에 대처할 준비도 없이 갔을까. 여행지에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안됐네요, 그 책 안쪽에 여기 도서관 주소가 있으니 누구라도 습득하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다려 보자”라며 그 친절하고 사려 깊음에다 위로까지 보탠 대답이다.

이런 난감한 친절을 보았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책이 저만치 달아나는 듯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순간 묘안이라도 있을까 하고 남편을 바라보니 ‘나는 이 일과 무관하오.’라는 메시지로 얼굴을 단단히 싸매고 있다. 위기에 몰리면 의외의 힘이 솟는 법, “외국여행 중에 잃어버려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라고 했더니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담당자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면 책값을 내야 한다.”면서 도리어 그쪽에서 미안해했다.

각본대로 일이 진행 되니 물어낼 금액이 걱정이었다.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책값의 너덧 배를 페널티로 물라 하면 어쩌나. 가난한 유학생에겐 작은 지출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당한 도적질의 대가는 치러야 하므로 우아하게 답을 기다렸다. 두툼한 목록을 뒤적이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3파운드 50펜스” 아이고머니나! 새 책의 30%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출간된 지 오랜 책이라 가치 하락을 염두에 둔 계산일까? 계산법이 무엇이든 참으로 합리적인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죄송해하지 마세요, 저는 원하던 책을 손에 넣었고 금액도 저렴해서 꾸벅 절이라도 할 심정입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를 우물거리며 책값을 치르고 의기양양하게 도서관 검색대를 통과하는 찰나, 묵직한 남정네 목소리가 내 등에 날아와 꽂힌다.

“야, 이 도둑년아!”

내가 불원만리 이국땅에서 일생일대의 대사(大事)를 치르는 동안 한마디도 않고 장승처럼 서 있던 남자가,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 다 듣게 시리 큰소리로, 더구나 그리 심한 막말을? 아무리 한국사람 한 명 없는 낯선 곳이라 해도 그렇지. 하지만 나는 그 막말을, ‘축하하오!, 해냈구려’로 해석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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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규   2013-04-19 00:42:23
ㅋㅋㅋ 세상 참, 나 참, 또 ㅋㅋㅋ
Uncle Cho   2013-04-19 00:50:37
아~ 하하하~~~~ ^^
유인걸   2013-04-19 05:25:58
나도 소리친다..야 이사기꾼아!!!......
김정림   2013-04-19 20:45:35
아~~ ㅎㅎㅎ
ㅋㅋㅋ
대단한신 김샘 *^^*
김필연   2013-04-20 09:08:20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데도요?
오경수   2013-04-22 11:09:35
^^* 푸하하~
국제사법재판소에 법적하자가 없는지?
자문 좀 받아 봐야 겠습니다.
김필연   2013-04-24 10:02:55
아서요 아서요. 제가 잘못했으니 이 쯤에서 넘어가십시다.^^
(혼잣말: 휴우~ 클 날뻔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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