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정당한 도둑질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3-04-18 23:08
조회수: 3453 / 추천수: 719


daisy_1_1.jpg (164.8 KB)




해묵은 짐을 정리하다 오래전에 그린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엉성하고 완성도도 낮은 습작 수채화 한 점, 이 그림을 따라 추억여행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 반사적으로 실소가 터졌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의 일화 한 가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1988년, 한국이 올림픽이란 큰 잔치로 시끌벅적하던 그 해, 우리 가족은 영국에 있었다. 가족 모두 운동을 좋아하는데 하필 올림픽 때 낮과 밤이 어중간하게 엇박자인 영국에 있다니. 올림픽 기간 동안 밤새워 중계방송을 보느라 부족한 잠을 메우려 교회예배 때는 물론, 학교에서도 버스나 메트로에서도 졸기 일쑤였지만 또다시 홀린 듯 한밤중에 텔레비전을 켜던 시절.  

그 시절 나는 디자인 공부 중이었는데 학교에서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한 재료가 구아슈(gouache)였다. 구아슈는 포스터컬러와 유사한 불투명물감으로 혼합이 쉽고 발색도 선명한 장점이 있긴 해도 농담(濃淡)이나 원근감을 표현하는 부분에선 아쉬움이 많은 재료였다. 그 아쉬움을 달래려 수채화 수업을 신청했다. 과목 이름은 영국수채화(English Watercolour Painting).

거참, 수채화 앞에 영국이 붙은 이유가 뭘까? 영국수채화는 별다른가. 언뜻 헤르만 헷세의 수채화를 떠올리며 유럽의 화풍이 거기서 거기겠지, 다닥다닥 붙은 나라들끼리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으려고, 했던 내 추측과는 달리 무지한 내 눈으로도 구분할 만큼 영국수채화는 사뭇 달랐다.

어둡고 칙칙하고 단색조에 가까운 암울하고 모호한 분위기로 해석한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서인지 도전심이 발동했고 수강신청을 하고 열심히 진도를 따라갔다. 그런데 주중 하루 수업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 동네 도서관에 가서 수채화 관련 책을 빌려 와서 집에서 습작을 했다.

특히 마스킹액(Masking Fluid)을 사용하는 작업에 재미를 붙여, 책에 있는 대로 따라 하고 똑같이 모작도 했다. 하지만 교재로 사용한 책을 반납할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시 그 책을 빌리려면 일정 기간이 지나야 하므로(다른 대여자를 배려한 제도), 나는 그 책을 사겠다 마음먹고 책 가게로 갔다.

낡고 헤진 책 상태가 말해 주듯 출간된 지 오래고 절판되어 구하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는 기간이 되면 다시 빌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지쳐갈 즈음, 한 한국 선배유학생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분실하면 책값을 물면 되니까 그 책이 꼭 필요하면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었다. 해 보자.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도서관으로 갔다.

혹시 내 영어가 어설퍼서 버벅거리다 말이 꼬이면 들통 날 테니 남편에게 비상통역사? 로 동행을 부탁했다. 남편은 자못 내키지 않은 어투로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 책을 복사하면 안 되겠느냐, 출국 전에 그 책에 있는 그림을 부지런히 다 그려라...,' 하지만 내 결심은 단호했다. 책을 곁에 두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어떤 대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서관으로 향했다. 담당자에게 이러저러해서 책을 분실했다고 했다. "아.  그러시다면 책값을 내시면 됩니다." 라는 답이 날아오리라 예상했는데 어이없게도 "2주간 여유를 줄 테니 그때까지 찾으면 가지고 오세요" 한다. 이 얼마나 친절하고 사려 깊은 처사인가. 다른 때 같았으면 감동할 일 아닌가.

하지만 그 정도 수위의 반응에 대처할 준비도 없이 나섰을까. 여행지에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여행지가 어딘지 모르지만 책 안 쪽에 여기 도서관의 주소가 있으니 누구라도 습득하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기다려 보자" 라며 또 그 친절하고 사려 깊음에 위로까지 보태어 답을 한다.

이런 난감한 친절을 보았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책이 저만치 달아나는 듯한 불안감이 들었다. 혹시 묘안이 있을까 하고 남편을 바라보니 '나는 이 사람과 무관하오.' 라는 메시지가 얼굴 한가득 이다. 에휴~ 하지만 위기에 몰리면 의외의 힘이 솟는 법, 순간 기특하고도 대견스러운 안이 떠올랐다.

"외.국.여행 중에 잃어버려서 아마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느냐?" 라고 했다. 섬나라 영국이니 외국이라 하면 물러서리라. 내 탄탄하고도 용의주도한 상황설정에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담당자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면 책값을 내야 한다."면서 되려 미안해했다.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각본대로 진행이 되자 이번에는 내가 낼 금액이 얼마일까가 걱정이 되었다.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책값의 서너 배 아니면 너덧 배를 페널티로 물라 하면 어쩌지.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그 책값의 몇 배는 제법 큰돈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툼한 목록을 뒤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매우 죄송하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3파운드 50펜스" 아이구머니! 새 책의 30%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감가상각에 출판연도를 고려한 계산이지 싶었다. 참으로 합리적인 나라로고!

"죄송해하지 마세요, 저로서는 원하던 책을 손에 넣었고 가격도 저렴해서 절이라도 할 심정입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를 입속으로 우물거리며 당당하게 책값을 내고 의기양양하게 도서관 검색대를 통과하는 찰나, 묵직한 남정네 목소리가 내 등에 날아와 꽂혔다.

“야! 이 도둑년아!!!“

깜짝이야! 내가 일생일대의 대사(大事)를 치르는 동안 단 한마디도 않고 장승처럼 서 있던 남자가,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 다 듣게 큰소리로, 더구나 그리 심한 막말을? 아무리 한국사람 한 명 없는 낯선 곳이라 해도 그렇지. 하지만 나는 그 심한 막말을, '축하하오!, 해냈구려' 로 해석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金必然







                            

       
이호규   2013-04-19 00:42:23
ㅋㅋㅋ 세상 참, 나 참, 또 ㅋㅋㅋ
Uncle Cho   2013-04-19 00:50:37
아~ 하하하~~~~ ^^
유인걸   2013-04-19 05:25:58
나도 소리친다..야 이사기꾼아!!!......
김정림   2013-04-19 20:45:35
아~~ ㅎㅎㅎ
ㅋㅋㅋ
대단한신 김샘 *^^*
김필연   2013-04-20 09:08:20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데도요?
오경수   2013-04-22 11:09:35
^^* 푸하하~
국제사법재판소에 법적하자가 없는지?
자문 좀 받아 봐야 겠습니다.
김필연   2013-04-24 10:02:55
아서요 아서요. 제가 잘못했으니 이 쯤에서 넘어가십시다.^^
(혼잣말: 휴우~ 클 날뻔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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