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뼁끼로 그린 민들레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3-04-02 17:24
조회수: 3774 / 추천수: 791


20130323streetlife_2_700.jpg (140.2 KB)



페인트를 뼁끼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네덜란드 말 Pek가 일본에서 와전(訛轉) 된 채 우리나라로 들어와 뼁끼로 통용되었다고 하는데 어릴 적 자주 들어서인지 페인트보다는 뼁끼가 친숙하거니와 페인트를 깎아내리는 면도 있어 여기서 나는 뼁끼로 부르려 한다. 큰돈 안 들이고 집수리나 마감재로 만만했던 뼁끼, 기능 면에서 만능이라 추켜세우며 여기저기 칠하다 보니 햇빛에 바래고 낡고, 덧칠에 덧칠을 반복해서 그전 뼁끼와 나중 뼁끼가 합세해 비늘 벗어지듯 너덜거려 골칫거리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뼁끼칠이 손쉬운 대안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10년 가까이 나는 서울시 도시디자인위원회와 타 위원회에 속해 있으면서 공원이나 건물, 도시가로물, 공공시설물, 신축 및 리모델링용 건물에 이르기까지 심의 때마다 뼁끼칠 좀 그만하자고 노래를 불렀다. 그 탓인지 도심의 신축 중인 건물의 가림막과 몇몇 항목을 제외하곤 뼁끼칠이 줄긴 했지만 도
심을 벗어나 흘깃만 스쳐도 그 몹쓸 뼁끼가 한반도를 잠식해버린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오지라고 할 깊은 산골에도 이 뼁끼란 녀석이 고색창연한 돌담에 손때 묻은 결 좋은 나무 대문에 심지어는 곱게 나이 먹은 기와에까지 올라앉아 헤픈 웃음을 짓고 있다. 더구나 문화마을이니 벽화마을 이니 예술마을 체험마을에, 더 기가 막히는 건 친환경 생태마을이라 이름 지어 놓고도 뼁끼로 덧칠을 해 놓은 곳에 서면 그저 할 말을 잃는다.

나는 30여 년 카메라를 손에서 놓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뼁끼칠 벽화는 카메라에 거의 담지 않았다. 정겨운 세월의 때를 덮어버린 뼁끼가 미워서 그랬다, 개중엔 효자 뼁끼칠도 있긴 한데 그걸 담다 보면 뺑끼문화를 조장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이대로 가다간 우리의 살 냄새 나는 마을과 골목이 온통 뼁끼칠로 도배가 될 것 같아 겁도 났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주택가 골목에서 뼁끼가 해낸 기특한 작업 하나를 발견했다. 좁은 골목 안, 대문이 없는 집 출입문 아래에 축담같이 생긴 디딤돌에 민들레 몇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사람 눈길도 잘 닿지 않는 한 자 높이쯤 되는 작은 디딤돌 모퉁이에 작은 민들레 몇 송이가 올망졸망 피어 있었다.

누굴까? 그는 무얼 그리고 싶었을까? 희망일까? 이상향일까? 화가의 가슴을 추측해 보았다. 더 높고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뛰어나고, 최상급 형용사만을 추구하는 세상을 향하여 화가는, 작고 어둡고 낮고 후미진 곳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걷는 거북이가 있어요. 벌새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1분
에 수십 번 날갯짓을 해야 하듯, 호박이 한번 굴러 될 일을 도토리는 수십 번을 굴러서 앞으로 가고 있음을, 그런 삶도 있음을. 밟히면서도 꿋꿋이 하늘을 향하는 민들레 같은 삶, 그 삶을 조금 느린 걸음으로 봐 달라고..., 화가는 민들레의 목청을 비려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도화지 한 장 크기에 뺑끼로 그린 민들레 몇 송이가 그동안 내가 접했던 그 많은 뼁끼칠의 대변자가 되어 항변하듯 일타를 가해 왔다. 너는 왜 그토록 페인트의 부정적 얼굴만 바라보았냐고. / 金必然







       
이호규   2013-04-03 03:13:09
지난 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에서는 '뺑끼'기 아닌 '뼁끼'로 불렀습니다. 어찌했던, 민들레 키높이에 맞춘 틈새공략(?)이 멋집니다. 페인터의 지략?
김필연   2013-04-03 10:22:12
아~ 뼹끼...
맞아요, 예전에 이진수의 뼁기통이란 장편이 있었지요.
페인트--> 뼁끼가 더 나을 것 가아요.
아휴~ 뺑짜 다 고치려면 날 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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