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막걸리 잔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1-02-22 21:10
조회수: 5003 / 추천수: 883


maksabal_1.jpg (284.8 KB)





막걸리 잔 / 김필연

며칠 전, 길 가다가 업소용 그릇 파는 가게가 보이기에 주저 없이 들어섰다. 집에서 막걸리 잔으로 쓰고 있는 잔이 이도 빠지고 가늘게 금이 갔지만, 선물 받은 것이라 쉽게 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엔간하면 바꾸겠다는 심산이었고, 요즘 들어 부쩍 유산균 덩어리인 생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생'을 강조하면서 막걸리를 사 들고 귀가하는 남편 때문에 그 이 빠진 잔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아저씨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약간은 크고 과장된 목소리로 나를 맞은 뒤 이내 능숙한 눈짓으로 나를 쓱 훑어 보더니 '막걸리 잔'이란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몇 개 필요하세요? 한 200개 정도 가능합니다." 신이 난 듯 아저씨는 묻지도 않은 가게 재고량까지 덧붙여 대답한다.

'깜짝이야? 200개씩이나? 마실 사람이 셋인데 세 개면 충분하지..., ' 란 말을 입속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목을 빼 기웃대는 내게 순식간에 바싹 다가온 아저씨는 "몇 개 필요하세요?" 몇 개에 강세를 주어 재차 묻는다.

나를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한 듯하다. 여긴 프로만 상대할 테니 그럴 법도 하겠다 싶었지만 순간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프로인척 해볼까? 아마추어인 거 알면 소매가격을 받겠지. 네 개 살 건데 비싸 봐야 얼마나, 아니야, 두세 배는 더 비쌀지도 몰라. 200개를 얘기한 걸로 보아 일단 내 외관은 프로로서 합격점이니...,

짧은 시간 동안 불이익에 대비한 별별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의연하고도 당당하게 "네 개요!" 했더니, "아이코~ 네 개요? 내 말을 복창하는 아저씨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내 딴에는 세 개 살까 하다가 구매량을 팍 올렸구먼.

이것저것 막걸리 잔으로 적합하다 싶은 것을 집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내 등 뒤에서 주인아저씨는 전혀 관심 없는 척 딴청을 핀다. 돈도 안 되는 성가신 손님이란 몸짓이 절로 읽힌다. 그런다고 기죽으면 안되지, "이거 한 개에 얼마에요?" 평소 내 목소리보다는 반 옥타브쯤 높인 톤으로 물었다.

"4,000원입니다...," 높낮이 없는 소극적 어조로 가격만 힐끔 던지고는 아저씨 또 딴청이다. 생각했던 가격에 비해 저렴하다 싶었는데 가격을 던지고 돌아서는 주인아저씨 옆얼굴에 숨은 익살기 어린 미소가 내 장난기를 부추겼다.

"이거 재료비는 500원도 안 들었겠구먼요. 3,000원에 주세요!" "200개 사셔도 4,000원입니다, 사모님!", 움직일 수 없는 가격이라는 듯 이번엔 '사모님'에 강세를 준 깍듯한 어투다. 이렇게 한동안 아저씨와 나는 흥정 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주고받은 끝에, 결국 여덟 개에 2만 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잔의 용도가 수정과 종지라는 대목에서 구매량이 네 개에서 여덟 개로 배나 뛰었고, 200개를 사도 4,000원이라던 단가는 2,500원으로 하향 조정, 아저씨 스스로 내가 제시한 가격보다 한 개에 500원이나 덜 받겠다는 딜이었다. 이런 손님은 퍼뜩 내 보내는 게 이익이다 싶었겠지.

따져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가게 아저씨는 네 개 팔 것을 여덟 개 팔았으니 매출을 두 배나 올렸고 나는 다섯 개 값으로 여덟 개를 손에 쥐었으니 표현 그대로 '동반성장' 아닌가. 연신 아저씨의 얼굴에 익살스런 미소가 떠나지 않은 걸로 보아 피차 지분대며 흥정을 즐긴 셈이다.

저녁 무렵, 남편에게 새로 산 막걸리 잔을 보여주며 흥정한 얘기를 늘어놓았더니 가타부타 무표정이던 이 양반, 고개를 돌려 "흥정 축하주로 막걸리가 있어야겠다!" 라며 내 흥정무용담에 대한 답을 아들아이에게 던진다. 막걸리 맛이 여느 때와 달랐음은 물론이다.

유명 작가의 수제품도 아닌 분명히 틀에 넣어 찍어냈을 업소용 잔 몇 개가 그날의 행복지수를 훌쩍 높여 놓았다. 세계 어느 명품이 이런 재주를 지녔을까. 익히 알듯 행복지수는 양이나 수나 품질의 순서가 아님이 확실하다. /金必然


*
2011년 03월 부천타임즈 게재







       
바 위   2011-02-23 00:28:31
고맙습니다 !!
유인걸   2011-02-24 04:40:57
막걸리 잔을 대포라고 하지요...사신 잔은 대포도 중포도 아니고 소포정도인데 아마도 찾잔용으로 만든것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모양새와 색감이 좋습니다...나는 집에서 서울 장수막걸리 마신지 5년 넘었습니다.위스키 온더록 잔으로 딱한잔
식사에 반주로 합니다..포도주가 그대신 없어 젔습니다....다이소에서 1000원주고산 잔이랍니다...
바 위   2011-02-24 13:30:41
유선생
인하시니
걸직 함이라
얼마나 存지요

고맙습니다.
김필연   2011-02-24 14:31:22
ㅎㅎ~ 유 선생님께서 와인에서 막걸리로 바꾸셨다니 친근감이 듭니다.
와인보다 분위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참에 곰곰 생각해 보니 와인이나 다른 주류는 그에 맞는 잔이 있는데
우리 전통주 막걸리는 서민이 애용하던 술이라 그런지
또 참이나 끼니에 가까워서 그런지 사발을 주로 사용해 칭하기를
'막걸리 한 사발'이라 하잖아요. 지금은 즐기는 차원인데 사발로 마시기엔...^^
바 위   2011-03-08 00:36:36
큰 일꾼 작은일꾼 가보거라 새이니라

할 머니 이미 알아 두 사발 얼른 주던

추억은 퍽 배고픈 봄 일 바로 이때 맞구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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