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제목: 막걸리 잔
분류: 산문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1-02-22 21:10
조회수: 5403 / 추천수: 966


함께가자13_14_600.jpg (121.5 KB)





길 가다가 업소용 그릇 파는 가게가 보이기에 주저 없이 들어섰다. 지금 쓰고 있는 막걸리 잔이 이가 빠지고 잔금이 가서 엔간하면 바꾸어야지 마음먹었고 요즘 들어 부쩍 유산균 덩어리인 생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고 ‘생’을 강조하면서 막걸리를 사 들고 귀가하는 남편 때문에 그 이 빠진 잔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주인아저씨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이내 능숙하게 나를 쓱 훑더니 ‘막걸리 잔’이란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몇 개 필요하세요? 200개 정도 가능합니다.” 신이 난 듯 아저씨는 묻지도 않은 가게 재고량까지 알려준다.

‘200개? 마실 사람이 셋이니 세 개면 되는데...,’를 입속에서 우물거리며 목을 빼 기웃대는 내게 바싹 다가온 아저씨는 “몇 개 필요하세요?” '몇 개'에 강세를 주어 재차 묻는다. 나를 음식점 주인으로 생각한 거로 보아 도매 가게인 듯했다. 프로인척 해 볼까? 아마추어인 거 알면 소매가격을 받겠지. 세 개 살 건데 비싸 봐야 얼마나?, 아니야, 두세 배 더 받을지도 몰라. 200개란 대목에서 일단 내 외관은 프로로서 합격점이야...,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받을 불이익이 떠올랐지만 나는 의연하고도 당당하게 “네 개요!” 했더니, “아이코~ 네 개요? 내 말을 복창하는 아저씨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역력하다. 내 딴에는 세 개 살까 하다가 주문량을 팍 올렸구먼.

이것저것 막걸리 잔으로 적합하다 싶은 것을 집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내 등 뒤에서 주인아저씨는 관심 없는 척 딴청을 피운다. 돈도 안 되는 성가신 손님이란 말을 몸으로 하고 있다. 그런다고 기죽으면 안 된다, “이거 한 개에 얼마에요?” 나도 평소 내 목소리보다 반 옥타브쯤 높인 톤으로 물었다. “4,000원입니다...,” 높낮이 없는 소극적 어조로 가격만 힐끔 던지고 아저씨는 또 딴청이다. 생각했던 가격보다 저렴하다 싶었는데 가격을 던지고 돌아서는 주인아저씨 얼굴에 비친 익살기가 내 장난기를 부추겼다. “이거 재료비는 500원도 안 들었겠구먼요. 3,000원에 주세요!” “200개 사셔도 4,000원입니다, 사모님!”. 움직일 수 없는 가격이라는 듯 이번엔 ‘사모님’에 강세를 준 깍듯한 어투다. 이렇게 한동안 아저씨와 나는 흥정 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주고받은
끝에 여덟 개에 2만 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잔의 용도가 수정과 종지라는 대목에서 구매량이 네 개에서 여덟 개로 배가 뛰었고, 200개를 사도 4,000원이라던 단가는 2,500원으로 아저씨 측에서 자진해서 하향 조정, 내가 제시한 가격보다 한 개에 500원이나 싼 가격이다. 이런 손님은 얼른 내보내는 게 이익이다 싶었을까.

따져보니 그렇지도 않다. 가게 아저씨는 네 개 팔 것을 여덟 개 팔았으니 매출을 두 배 올렸고 나는 다섯 개 값으로 여덟 개를 손에 쥐었으니 '윈윈 거래' 아닌가. 연신 아저씨의 얼굴에 익살스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은 거로 보아 피차 지분대며 흥정을 즐긴 셈이다. 저녁 무렵, 남편에게 새로 산 막걸리 잔을 보여주며 흥정한 얘기를 늘어놓았더니 무표정이던 이 양반, 고개를 돌려 “흥정 축하주로 막걸리가 있어야겠다!”라며 아들아이에게 반응을 던진다. 유명 도예가의 수제품도 아닌 분명히 틀에 넣어 찍어냈을 업소용 잔 몇 개가 그날의 행복지수를 훌쩍 높여 주었다.
/金必然


*
2011년 03월 부천타임즈 게재







       
바 위   2011-02-23 00:28:31
고맙습니다 !!
유인걸   2011-02-24 04:40:57
막걸리 잔을 대포라고 하지요...사신 잔은 대포도 중포도 아니고 소포정도인데 아마도 찾잔용으로 만든것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모양새와 색감이 좋습니다...나는 집에서 서울 장수막걸리 마신지 5년 넘었습니다.위스키 온더록 잔으로 딱한잔
식사에 반주로 합니다..포도주가 그대신 없어 젔습니다....다이소에서 1000원주고산 잔이랍니다...
바 위   2011-02-24 13:30:41
유선생
인하시니
걸직 함이라
얼마나 存지요

고맙습니다.
김필연   2011-02-24 14:31:22
ㅎㅎ~ 유 선생님께서 와인에서 막걸리로 바꾸셨다니 친근감이 듭니다.
와인보다 분위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참에 곰곰 생각해 보니 와인이나 다른 주류는 그에 맞는 잔이 있는데
우리 전통주 막걸리는 서민이 애용하던 술이라 그런지
또 참이나 끼니에 가까워서 그런지 사발을 주로 사용해 칭하기를
'막걸리 한 사발'이라 하잖아요. 지금은 즐기는 차원인데 사발로 마시기엔...^^
바 위   2011-03-08 00:36:36
큰 일꾼 작은일꾼 가보거라 새이니라

할 머니 이미 알아 두 사발 얼른 주던

추억은 퍽 배고픈 봄 일 바로 이때 맞구나

고맙습니다.
의견(코멘트)을 작성하실 수 없습니다. 이유: 권한이 없는 회원레벨
     
번호 분류  글쓴이 제목 등록일 추천 조회
53
 김필연
 낙화  5 2011-05-25 838 4346
52
 김필연
 까르르 맴맴  5 2011-04-24 816 4440
51 포토에세이
 김필연
 가장 큰 선물  13 2011-03-21 958 5288
50
 김필연
 어떻게 알까  6 2011-02-25 792 4555
산문
 김필연
 막걸리 잔  5 2011-02-22 966 5403
48
 김필연
 내 것이 아닌데  2 2011-01-27 819 4605
47
 김필연
 이맘때 받는 초대장  5 2010-12-02 928 4994
46
 김필연
 찻물 한 모금  6 2010-10-22 887 4984
45
 김필연
 오일장 나들이  2 2010-10-04 907 4982
44
 김필연
 가을로 가는 길  4 2010-08-26 899 4971
43
 김필연
 고맙다  5 2010-06-23 895 5079
42
 김필연
 숙제 삼매경  2 2010-05-26 949 4868
41
 김필연
 꽃 그림자  3 2010-04-21 905 5147
40
 김필연
 풋봄  6 2010-03-23 936 5376
39
 김필연
 겨울의 승전가  6 2010-02-28 916 4827
38
 김필연
 소임을 다한 장막  5 2010-01-29 906 4916
37
 김필연
 온기가 그리운 달  4 2009-12-03 991 5346
36
 김필연
 늙지 않는 기억  4 2009-10-29 931 5303
35
 김필연
 이웃  9 2009-09-30 916 5142
34
 김필연
 바다는 늘  5 2009-09-01 907 5303
      
 1   2   3   4   5   6   7   8   9   10  .. 11   [다음 10개]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DQ'Style 
:::김필연 시인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