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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이 보내는 표식> - 류시화
분류: 여행 & 기타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8-01-29 19:07
조회수: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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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내는 표식>


내 시를 번역 중인 폴란드인 친구가 미르자 갈리브의 2행시를 편지 말미에 적어 보냈다. 19세기 인도 시인 갈리브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으나 그의 시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가 거의 처음이었다.나는 음악도 아니고 악기도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부서지면서 내는 소리 짧은 시에 담긴 무엇인가가 마음에 다가왔다. 그렇지 않은가. 시는 희망과 환희의 노래일 때도 있지만, 마음과 존재가 무너지고 부서질 때 내는 소리일 때가 있다. 그 소리가 클 때 독자도 놀란다. 갈리브는 인도 무굴제국의 마지막 시인으로, 주로 우르두어로 시를 썼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여행 중에 산 엽서들을 정리하다가 이슬람 양식의 둥근 지붕 위로 비둘기들이 날아오르는 사진 아래 인쇄된 2행시를 발견했다. 모든 것 속에 당신이 있으나 그 어떤 것도 당신과 같지 않네

역시 갈리브의 시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풍경이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채워 주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이를 대신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우르두어는 인도에 세워진 무굴제국의 영향으로 산스크리트어와 아랍어, 페르시아어가 뒤섞이면서 자연스럽게 발달한 인도이란어파의 언어이다. 힌디어와 거의 비슷하나, 이슬람교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다듬어진 언어이라서 '우르두어는 그냥 말해도 다 시’라고 할 만큼 운율이 빼어난 것이 특징이다. 갈리브는 가장 뛰어난 우르두어 시인이다.

언제 샀는지도 잘 기억 나지 않는 엽서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격월로 받아 보는 명상 잡지 <샴발라선>을 넘기던 중 갈리브의 또 다른 2행시가 눈에 띄었다.

새들을 허공에 날아가게 하라
너의 새는 돌아올 것이니

왜 붙잡으려고 하는가? 떠나는 것은 떠나게 하고, 끝나는 것은 끝이게 하라. 결국 너의 것이라면 네게로 돌아올 것이니. 고통은 너를 떠나는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 보내지 못하는 네 마음에 있으니. 상류층 이슬람 전통에 따라 13세에 결혼한 갈리브는 서른 살까지 일곱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한 명도 유아기를 넘지 못하고 죽었다. 그 고통이 여러 편의 시에 담겨 있다. 편지를 많이 쓴 갈리브는 한 편지에서 자신이 갇힌 첫 번째 감옥은 인생이고, 두 번째 감옥은 결혼이라고 고백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보내는 것처럼 갈리브와 관련된 표식들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났다. 그해 여름, 무더운 날씨 속에 올드델리의 복잡한 골목을 걷고 있는데 한 중년 남자가 "갈리브 하벨리." 하고 말하며 좁은 골목을 가리켜 보였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내가 그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경험하는 일이다.

갈리브 하벨리 근처에서 걸인 행색을 한 노인이 나를 보자 손을 내밀어 적선을 청하며 노래를 불렀다. 지나는 행인이 통역해 주었다.

내 손금을 보려고 하지 말라
손이 없는 자에게도 행운이 찾아올지니

갈리브 하벨리는 ‘갈리브의 집’이라는 뜻으로, 시인은 이 집에 살면서 대표시들을 쓰고 그 집에서 숨을 거뒀다. 벽마다 갈리브의 시가 걸려 있고, 유품과 두꺼운 자필 시집이 전시되어 있다. 갈리브는 마지막 무굴제국의 궁정시인으로 활동했지만 왕의 권위에 도전한 죄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우연이 중첩되어 필연이 된다. 알고 지내는 시타르 연주자이며 수피 가수인 우스타드 수자트 칸이 어느 날 자신이 노래한 갈리브의 시를 들어보라며 내게 ‘천 개의 욕망’이라는 앨범 제목을 알려주었다.

천 개의 욕망 모두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으니
그것들 중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난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원하네

오늘날 갈리브의 시는 전 세계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고, 많은 전통 가수들이 노래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그의 시와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이 소수였으며, 늘 세상의 많은 오해와 비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신이여,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른 가슴을 주시든지, 아니면 차라리 내가 말하는 방식을 바꿔 주소서

그 이후에도 나는 책에서, 대화에서, 게스트하우스 벽에서, 다른 가수들(누스라트 파테 알리 칸과 자그지트 싱)의 노래에서 계속해서 갈리브의 시를 만났으며, 그것은 마침내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신호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갈리브의 시를 한 권의 시집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나 자신의 결정이라기보다 삶이 자연스럽게 나를 그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죽음은 정해진 날 틀림없이 찾아오는데
잠이여, 너는 왜 밤새도록 오지 않는가

미르자 갈리브의 시집뿐 아니라, 내가 삶에서 이룬 중요한 일들은 나 자신의 계획들이 아니라, 이처럼 내 계획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난 일련의 표식들로 인해 이뤄진 것들이다. 그 표식들을 놓치지 않고 믿고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답이 얻어졌고, 그 경우에는 세속적인 성공과 관계없이 결과가 다 좋았다. 그 표식들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화살표들이었다. 오히려 내 머리로 궁리해서 만든 계획이 내가 살아야 할 삶을 방해할 때가 많았다. 크나큰 계획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계획 밖에서 이루어진다.

나를 떠나면서 당신은 세상의 끝날 우리가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인가, 마치 세상의 끝날이 다른 날인 것처럼

표식에 주의를 기울이라. 불분명하고 복잡한 삶의 미로 속에서 선명하게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작은 표지판들이 있다. 그 길로 나아가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표식들은 우리를 가슴 두근거리게 만든다. 가슴이 그 표식들과 접촉하기 시작하거나 그 표식들이 가슴과 접촉하도록 허락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 갈리브는 썼다.
'모든 색깔들을 알아차리려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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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규   2018-01-31 00:24:25
류시인, 지금도, 지금쯤은 인도에 있지 않을까요?
멋진해마   2018-02-06 16:15:22
우연이 중첩되어 필연이 된다. - 언젠가 써먹을 날이 있겠지요...

알고 지내는 시타르 연주자이며 수피 가수인 우스타드 수자트 칸이 어느 날 자신이 노래한 갈리브의 시를 들어보라며
" 내게 ‘천 개의 욕망’이라는 앨범 제목을 알려주었다.!!! " - 우스타드 수자트 칸은 아마 부자로 살고 있을것 같습니다.

죽음은 정해진 날 틀림없이 찾아오는데
잠이여, 너는 왜 밤새도록 오지 않는가 - 잠은 죽음 보다 게으르른 나쁜 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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