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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싱의 수상록 - 5회분 텍스트 초록 - 월류봉 이상옥
분류: 여행 & 기타
이름: 김필연


등록일: 2018-02-14 09:41
조회수: 84




기싱의 수상록 초록 마지막 회분을 올립니다. 그 동안 성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월류봉)






    이 살기 좋은 데본에는 음침한 날이 드물고, 혹시 그런 날이 닥쳐와도 나는 잠시도 지루하지 않다. 북녘 지방의 그 길고도 사나운 겨울이라면 내게 상당한 정신적 시련을 줄 테지만 이곳에서는 가을 뒤에 찾아오는 계절이 안식의 계절이며 한 해에 한 차례씩 자연이 잠을 자는 계절일 뿐이다. 그래서 이 안식으로 가득한 겨울의 영향 속으로 나도 빠져든다. 난로 가에서 그저 졸면서 한 시간씩 보낼 때가 아주 흔하고, 생각에 잠기는 데 만족한 나머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을 때도 자주 있다. 하지만 이곳은 겨울에도 해가 비치는 날이 자주 있는 편이며, 다사로운 햇빛은 자연이 꿈을 꾸며 짓는 미소처럼 보인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멀리 헤매고 다니기도 한다.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풍경이 변한 것을 눈여겨보는 일이 즐겁다. 여름 동안 숨어있던 시내며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즐겨 걷는 오솔길들도 낯선 모습을 드러내므로 나는 그 길들과 더 친숙해질 수 있다. 그리고 옷을 벗어버린 나무들의 구도(構圖)에는 희귀한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다 눈이나 서리가 내려 차분한 하늘을 배경으로 그물처럼 엉겨 있는 나뭇가지들을 은빛으로 장식하면, 아무리 쳐다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경이로운 광경이 된다. 날마다 나는 보리수나무의 산호색 싹을 바라본다. 이 싹이 터지기 시작할 때면 내 즐거움에 무언가 아쉬움이 섞인다. (Winter 12)

    자연물을 가지고서 상징을 삼던 풍습이 거의 사라져버린 것은 현대인의 생활이 보여주는 황량한 모습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성시되는 나무가 없다. 한때는 참나무가 영국인들의 마음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이야 누가 참나무를 존중하는가? 우리는 쇠의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감탕나무나 겨우살이를 팔아서 돈벌이를 하지만, 녹색 나뭇가지들을 살 수 없게 된다 한들 장사꾼들을 제외하고 누가 상관할 것인가. 정녕 하나의 상징이 다른 모든 상징들을 무색하게 했으니 그것은 바로 동그랗게 주조된 금속이다. 돈이 최초로 권세의 상징이 된 이래로 그 많은 시대가 지났지만, 돈을 소유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속에서 기장 초라한 보답밖에 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는 바로 우리 시대라고 말해서 어폐가 없을 것이다. (Winter 15)

    최근에 나는 봄빛을 기다리다 조급해진 나머지 이튿날 아침 잠이 깨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침실 블라인드를 걷어 올린 채 자리에 들곤 했다. 오늘 아침에는 해 뜨기 직전에 잠이 깼다. 대기는 평온했고 서쪽으로 희미하게 감도는 장비 빛은 동녘이 맑은 하루를 기약하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구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앞을 바라보니 뿔처럼 뾰족한 조각달이 지평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녘의 기약은 지켜졌다. 조반을 든 후 나는 난로 가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지 난로 불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다. 태양에 이끌려 밖으로 나온 나는 아침 내내 축축이 젖은 오솔길을 산책하며 유쾌하게 대지의 향내를 맡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첫 애기똥풀 꽃을 보았다.

     그러니 다시 한 번 한 해가 완전히 한 사이클을 돈 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월은 이토록 빠를까. 오오, 이토록 빠르기만 하단 말인가. 지난해 봄을 맞은 후에 어느새 열두 달이나 지나갔는가. 내가 삶에 이토록 만족하고 있으니까 삶은 아까운 행복을 나에게는 베풀기 싫다는 듯이 이렇게 휙휙 지나가야 하는 걸까. 노역과 근심과 늘 헛되기만 하던 기다림으로 인해 한 해가 지루하게 끌던 때도 있었다. 더 먼 옛날로 올라가서 어린 시절은 한 해가 끝없이 길어 보였다. 세월이 빨리 흐르는 것은 우리에게 삶이 비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경우처럼 하루하루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한 걸음이 되는 시절에는 새 경험을 모으느라 하루가 길어 보인다. 지나간 한 주일은 그 기간에 배운 것들을 회고할 때 어느새 먼 과거처럼 보인다. 닥쳐올 한 주일은, 특히 어떤 기쁜 일을 예고하고 있을 경우, 멀리서 머뭇거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년기가 지나면 우리는 배우는 것이 거의 없고 기대도 거의 하지 않는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고 다가올 내일과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시간씩 구별조차 되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지체시키는 것은 마음이나 몸이 느끼는 고통뿐이다. 하루를 즐겨 보시라. 그러면 그 하루는 한 순간으로 줄어들고 말 것이다.

     마음대로 한다면 나는 앞으로 여러 해를 더 살고 싶다. 하지만 나에게 미처 1년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나는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편히 살지 못하던 시절에는 죽는 일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다 할 목표 없이 살아 왔을 터이므로 내 종말도 돌발적이요 무의미해 보였을 것이다. 이제는 나의 삶도 완성된 셈이다. 어린 시절의 그 자연스러운 비성찰적 행복감으로 시작되었던 나의 일생이 이제는 성숙한 마음만이 누리는 당연한 평온 속에서 끝날 것이다.

   한 작품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써서 그 끝을 본 후에 내가 감사의 한숨을 쉬며 펜을 내려놓았던 적이 얼마나 여러 차례 있었던가. 결함투성이의 작품이었지만 내 나름으로는 성실하게 썼으며 시간과 환경과 내 자신의 천성이 허용하는 한 최선을 다했다. 내 일생의 마지막 시간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내가 일생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때맞춰 끝맺은 긴 과업이요 결함은 많으나 그런 대로 최선을 다해서 쓴 한 편의 전기라고 여길 수 있다면, 그리고 만족스럽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아무 생각도 없이 내가 “끝”이라는 말로 마지막 숨을 거두고 뒤이어 오는 안식을 반가이 맞이할 수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Winter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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